설악산에서의 하룻밤

2015. 6. 2. 10:52산행일기

- 산행일자 : 2015년 5월 27일 ~ 28일

- 산행코스 : 한계령-중청대피소(1박)-희운각대피소-천불동계곡-비선대-소공원

- 산행동무 : 한선수, 산여인

 

설악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산여인님이 1박2일 일정으로 공룡능선에 들어가신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산위에서 밤을 보낸 지도 오래 되었고, 공룡에 발길을 끊은지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언제부터 공룡에 한 번 같이 가자고 하던 한선수는 말을 꺼내자 마자 바로 콜을 부르고, 대피소 예약과 준비물 배정, 접선장소와 시각까지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니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 하며 뛰는 속도가 빨리진다.

 

마침내 D-1, 보통은 기대되는 산행을 앞둔 전날에 잠자리에 일찍 들지 못하는 유아틱한 습관이 있는지라 이번엔 특단의 조치를 강구한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금새 잠에 빠지는 또 다른 멍멍틱한 습관이 있어, 승연이를 살살 꼬드겨 거실 소파에 누운 채로 머리를 쓰다듬도록 시키니 효과만점, 금새 코를 드르렁 골며 잠이 들었단다.

"아빠!! 침대 가서 자~~" 하는 말을 듣고 비몽사몽 비틀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털썩 쓰러지는 순간, 꽈당!! 으악!!

쓰러지는 각도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 침대의 모서리로 몸이 떨어져 그대로 몸이 반바퀴 뒤집어지며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다.

방바닥에 꼬리뼈로 착지, 보너스로 팔꿈치는 침대난간에 찍고 머리는 협탁에 헤딩~~

집안 식구들 다 몰려 들어오고, 오분 이상을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승연이가 한마디 한다. "어휴~ 겨우 재워놨더니 잠 다 깼겠네~~"

 

어찌어찌 소란을 정리하고 잠이 들어 다음날 아침...

천호역에서 접선에 성공을 하고, 청국장 한그릇씩 먹고, 널널한 도로를 달려 한계령휴게소에 도착한 시각이 09:30경.

주말에 이시각에 도착했다면 주차할 자리 찾느라 또 한바탕 했을 것인데, 주차장도 여유롭고 줄지어 올라가는 산행객도 보이질 않는다.

역시 평일산행이 최고~

 

 

 

 

인적이 뜸한 한적한 등로를 따라 걸으니 누구는 LP판 튀기듯이 노래속의 한구절만 계속 반복하며 흥얼거리고..

누구는 야생화를 카메라에 담는다고 앞서다가 뒤서다가...

나는 야생화 이름을 맞춰보겠다고 첫글자만 힌트를 달라고 졸라대고...

첫글자를 듣고 대번에 이름이 떠오르는 것도 있지만, 생각이 안나는 것은 다음에 만날 때까지 생각해 보면서...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길을 걷는다.

 

 

 

 

나름 촬영포인트라고 생각되는 지점에선 어김없이 걸음을 멈추고 자세를 잡고 있다.

 

 

 

 

드디어 서북능선의 한계삼거리에 올라선다.

오늘의 목적지인 중청대피소까지 절반도 훨씬 못미친 지점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힘들게 도착했기 때문에 "드디어"란 단어가 튀어 나온다.

배낭이 무거워서 그러나? 그동안 산행을 너무 게을리 해서 체력이 떨어졌나? 큰걸음 할 때마다 엉치부근이 욱씬거리긴 하지만, 그게 걷는데 큰 영향이 있나?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르지만, 한두번 가본 길도 아니고... 게다가 오늘은 중청까지만 가면 되는 걸~~

 

 

 

 

 

 

 

 

 

 

 

 

중청 가는 길에는 큰앵초가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 외에도 검종덩굴, 금마타리, 눈개승마, 금강애기나리 등등 야생화들이 길 옆에 도열해 있는데...

 

 

 

 

꽃이고 뭐고 이젠 다리에 힘이 빠져서 한걸음 옮기기가 버겁다.

오르막 걸음은 체중을 올리지 못하겠고, 내리막은 체중을 지탱하지 못해 자꾸만 휘청거린다.

앞의 두명과의 거리가 초반에 비해 두배 이상 더 많이 벌어지고, 이리 힘들었던 산행이 또 언제였는지....

 

 

 

 

그래도 조망이 트이는 곳에서 가쁜 숨을 돌리며 둘러본 주변의 풍경은 과연 설악이었다~

 

 

 

 

다른 님들 블로그에서만 보았던 참기생꽃도 산여인님 덕에 처음으로 알현하게 되고...

 

 

 

 

걸어 온 서북능선을 배경으로.. 근데 표정이 x씹은 얼굴이다.

 

 

 

 

 

 

 

 

털진달래 밭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다 떨어지고 남은 꽃송이가 셀 수 있을 정도다.

아직 대피소의 자리배정시간도 멀었고, 대피소에 들어가면 시끌벅적할 것이 뻔하므로 혼자 조용히 이곳에 앉아 멍하니 주위 풍경을 바라본다.

산위에 조망 좋은 자리에 앉아 멍 때리는 그 시간이 참 좋다.

 

 

 

 

멍 때리는 중~~~

 

 

 

 

충분히 멍 때리고 대피소로 가는 길..

대청에서 양옆으로 흘러내린 선의 비율이 안정감 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해 본다.

흔히 말하는 황금비율?? 뭐 그딴 거 아닌가 싶고....

 

 

 

 

중청 앞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저곳, 공룡능선을 이 몸상태로 내일 갈 수 있을까?

하룻밤 지나면 좀 나아지려나?

하루도 아니고 이틀씩이나 시간을 빼서 여기까지 고생하며 왔는데, 못가게 되면 억울해서 어쩌지?

백팔번뇌가 머리 속을 휘어 돌아치니 표정이 좋을 리가 없다.

 

 

 

 

 

 

 

 

각자 준비해 온 재료와 도구를 꺼내 저녁만찬을 차린다.

백운봉에서 로얄살루트와 궁합을 맞춰 보았던 기네스맥주는 그 때 만큼은 아니었지만, 내 입맛에는 소주와도 꽤 괜찮은 호흡을 보여주었다.

오늘 새롭게 알게된 또 다른 궁합은 "삼겹살+깻잎+파래김"의 조화였다.

 

 

 

 

미리 구워 놓았다가 내일 공룡에서 점심반찬으로 먹으려고 했던 쏘세지인데, 한봉지 더 가져오길 잘했다.

저녁에도 잘 팔리네~~

      

 

 

 

 

두분은 대청에 일몰을 구경하러 올라가시고, 나는 대피소에 남아 아직도 내일 저기 공룡을 갈지 말지 갈등 중.

 

 

 

 

 

 

 

 

일찌감치 저녁을 먹은터라 소등시간 전부터 자리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피터팬님한테서 전화가 들어 온다.

궁금해서 하셨다고...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다가 내 몸상태를 알려주니 공룡은 포기 하라고 하신다.

공룡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몸 상하면서 산행하면 나만 손해니... 뻔히 다 알고 있는 말이긴 하지만, 피터팬님이 그리 말하시는 것을 듣고 나니,

"네 죄를 사하노라~~" 하는 것 처럼 희안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음 속 번뇌가 사라지고 욕심을 버리니 금새 잠이 든다.

 

곤히 자던 중, 발목이 차가워서 화들짝 놀라 잠이 깼다.

이번엔 코도 많이 골지 않았다고 한다.

부지런한 산여인님은 동트기 전부터 일어나 바깥 구경을 다 하고 들어와 깨우면서, 무슨 군대 암구호 전달하듯이 "외설악에 운해!!" 딱 한마디 하고 다시 나가신다.

 

 

 

 

 

 

 

 

아침식사와 세면은 희운각에 가서 하기로 했으니 기상하자마자 바로 배낭 둘러메고 희운각으로 내려선다.

이곳 역시 털진달래는 다 맛이 갔다.

 

 

 

 

 

 

 

 

 

 

 

 

 

 

 

 

 

 

 

 

희운각대피소가 자리잡고 있을 저 계곡 아래에서는 운무와 아침햇살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희운각대피소에서 미역국과 누룽지, 어제 먹다 남은 밥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모닝커피까지 여유롭게 한잔씩 나누어 마시고...

산여인님 왈, 내 표정이 어제와 딴판이라고 하신다.

어제는 온갖 번뇌에 가득한 속세인의 얼굴이었는데, 오늘은 무척 편하고 밝아 보인다고...

그럼요~ 어제밤 득도를 해서 깨달음을 얻었는걸요~

갈길이 먼 두분은 먼저 희운각을 뜨고, 나는 남아서 짐을 다시 정리하고 천천히 천불동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이곳 갈림길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는 것을 보면 아직 깨달음이 부족한 듯 하다.

 

 

 

 

5시간 이상을 벌었는데, 일찍 내려가서 뭐한다요?

엊저녁 물티슈로 거의 샤워를 하다시피 하긴 했지만, 진짜 물에 발만 담그고 있느니만 못하다.

세수하고 머리감고 양치하고 발씻고,  대충 몸도 닦고...개운하네~~

 

 

 

 

 

 

 

 

 

 

 

 

 

 

 

 

 

 

 

 

 

 

 

 

화재로 손실되어 새로 만들어진 양폭대피소.

 

 

 

 

 

 

 

 

이런.. 천불동 내려 서는 길도 힘이 들고 자꾸 다리가 휘청거리네~~

사람 몸의 구조가 참 복잡하고 오묘해서, 한곳이 고장나면 무의식 중에 고장난 자리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부위가 일을 더 많이 하게 되고 그게 길어지면 그 다른 부위에도 무리가 지속되어 고장나고 그러는 모양이다.

다행히 시간이 아주 넉넉하니 쉬엄쉬엄 걷는다.

 

 

 

 

 

 

 

 

오늘 참 희안한게... 해뜨면서부터 산위에선 뜨겁고 덥더니 하산해서 바닥에 내려오니 써늘한 기운이 감돈다.

 

 

 

 

아까 중청에서 내려다 본 운무가 12시가 다 된 지금까지 여전히 외설악을 덮고 있다.

저기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도 권금성에서는 뭐 아무것도 안보일 것 같은데....

 

 

 

 

산에서 뭐 궁금한 것 있으면 무조건 피터팬님이 다산콜센터이다.

대중교통으로 소공원에서 한계령까지 차회수하러 가는 방법을 물어보니 못알아 들으면 바보소리 들을 정도로 잘 알려주신다.

시내버스 암거나 타고 나가면 해맞이공원.. 길건너면 구멍가게에서 시외버스 표를 팔고... 버스시간이 여유가 있으면 어디가서 물회를 먹어라~ 하는 것까지..

그리고 공룡간 사람 기다리려면 시간이 남으니 어디가서 사우나를 하는데, 거기 문을 닫았으면 그 옆에 또 대중탕이 하나 더 있다는 것까지.. ㅋㅋ

안타깝게도 버스가 금방 도착하게 되어 물회는 못먹었지만, 피터팬님 알려주신대로 사우나까지 깔끔하게 하고 다시 소공원으로 시간 맞춰 돌아가니 공룡의 용사 두분이 씩씩하게 걸어 내려 오고 계신다.

 

처음으로 공룡을 올랐지만 거뜬하게 걸어낸 한선수의 무용담을 한귀로 들으며, 나름 생각해서 시원한 파워에이드 한병 사서 오는 길에 나도 목이 말라 조금 마셨더니 갈증나서 두병도 모자라는 마당에 생각없이 그걸 마셨다고 타박하는 산여인님의 잔소리를 또 다른 귀로 들으며....

미리 검색해 놓은 명태회냉면집에 가서 저녁을 먹으며 난해했던 이틀간의 일정을 마무리 짓는다.

 

       

 

'산행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등산  (0) 2015.06.20
덕유산  (0) 2015.06.12
서리산-축령산  (0) 2015.05.19
으름꽃  (0) 2015.05.08
대전둘레산길, 식장산~계족산  (0) 2015.04.17